지난 주말에 친구들과 '나폴레옹'을 보러 갔다. 리들리 스콧과 호아킨 피닉스의 조합이라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기대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 왜곡 논란도 있었고 평점도 그렇게 높지 않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2시간 3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리들리 스콧이 나폴레옹의 일대기를 어떻게 그려냈는지 궁금해서 큰 스크린으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명의 삶을 한 편의 영화에 담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게 성공했는지는 좀 미지근한 느낌이다.
줄거리
영화는 프랑스 혁명 시기, 툴롱 전투에서 포병 장교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이 영국군을 물리치며 두각을 나타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그의 전략적 천재성이 처음 드러나는데, 젊은 나폴레옹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후 영화는 꽤 빠르게 그가 조세핀(바네사 커비)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둘의 관계가 이렇게 영화의 중심축이 될 줄은 몰랐는데, 꽤 흥미로웠다. 특히 전쟁터에서 조세핀에게 보내는 나폴레옹의 편지들이나 그녀의 부정에 대한 집착은 역사적 인물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좋은 장치였다.
군사적으로는 이집트 원정부터 시작해서 아우스터리츠 전투, 러시아 원정, 워털루까지 대표적인 전투들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 장면이 압권이었다. 얼어붙은 호수를 이용한 전술은 영화적으로 완벽하게 표현됐고, 이런 걸 큰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러시아 원정의 실패는 좀 허무하게 넘어간 느낌이 있었는데, 모스크바 불길 속에서 철수하는 장면은 그래도 인상적이었다.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그의 영광은 끝나고, 결국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개인적으로 의외였던 건 영화가 나폴레옹-조세핀 로맨스에 꽤 많은 비중을 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조세핀에게 완전히 매료된 나폴레옹이 그녀의 부정에 상처받고,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면서 결국 이혼하게 되는 과정이 꽤 자세히 그려진다. 근데 재밌는 건 마지막까지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완전히 잊지 못했다는 거다. 영화는 그가 죽을 때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이 '조세핀'이었다고 보여주는데, 이게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틱한 결말을 위한 장치로는 좋았다.
시대적 배경
영화를 이해하려면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상황을 알면 좋을 것 같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거의 생략하고 바로 시작해서 좀 아쉬웠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세워졌지만, 이내 공포정치로 변질됐고 이런 혼란기에 나폴레옹이 등장했다는 기본적인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뭔가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는 관객들을 전제로 한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폴레옹 시대는 전쟁 방식이 크게 바뀐 시기인데, 영화는 이 부분을 꽤 잘 보여준다. 전통적인 정형화된 전투 방식보다 기동성과 화력 집중을 중시한 나폴레옹의 새로운 전술은 당시 유럽에 혁명적인 변화였다. 영화에서 나폴레옹이 전략을 설명하는 장면들이 몇 번 나오는데, 이런 부분들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는 징병제를 통해 대규모 군대를 만들었고, 이는 지금으로 치면 '국민군' 개념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나폴레옹이 혁명의 이념을 유럽에 전파하면서도, 스스로는 황제가 되어 절대 권력을 갖게 된 아이러니를 영화가 좀 더 깊이 다뤘으면 좋았을 것 같다. 영화에서는 그저 "프랑스 혁명이 끝났다"라고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 관을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모순에 대한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이나 정치적 갈등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그가 만든 나폴레옹 법전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데, 이게 사실 오늘날까지도 많은 국가의 법체계에 영향을 준 중요한 업적이라는 점은 좋았다.
문화적으로는 영화의 미술과 의상 디자인이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특히 나폴레옹 대관식 장면의 화려함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영화는 그의 군사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문화적 영향력까지 다루진 않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통해 이집트학의 발전을 이끌었고, 그가 모은 예술품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기초가 됐다고 한다. 이런 부분들도 영화에서 조금이라도 다뤘으면 더 입체적인 인물 묘사가 됐을 것 같다.
총평
'나폴레옹'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리들리 스콧의 전투 장면 연출이다. 특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얼음 호수 위를 걷는 오스트리아군과 그들을 물리치는 프랑스군의 대비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 장면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적으로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워털루 전투도 혼란스러움과 비극성을 잘 담아냈고, 스콧 감독 특유의 웅장한 스케일이 느껴졌다. 다만 러시아 원정같이 중요한 사건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웠다.
호아킨 피닉스의 나폴레옹 연기는 좀 의외였다. 보통 역사물에서 위대한 지도자는 카리스마 넘치고 영웅적으로 그려지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꽤 인간적이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연기했다. 특히 조세핀에 대한 집착이나 사회적 상황에서의 어색함 같은 부분들이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접근이 신선하게 느껴졌는데, 역사적 영웅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 바네사 커비는 조세핀 역할을 정말 잘 소화했다. 그녀의 복잡한 감정과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보여줬다.
영화의 가장 큰 논란은 역사적 정확성 부분인 것 같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영화 속 장면들, 특히 나폴레옹이 직접 대포를 쏘는 장면이나 피라미드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등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스콧 감독은 인터뷰에서 "역사적 사실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는데, 솔직히 영화니까 어느 정도 각색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너무 왜곡된 부분들이 있어서 조금 거슬렸다. 나폴레옹의 생애에서 중요한 많은 사건들이 생략되거나 압축된 것도 아쉬운 점이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은 완벽한 역사 수업이라기보다는 한 복잡한 인물의 야망과 사랑, 그리고 몰락을 그린 영화로 봐야 할 것 같다. 85세의 리들리 스콧이 여전히 이런 대규모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정말 존경스럽다. 전투 장면들의 웅장함과 당시 유럽의 화려한 궁정 생활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영화적으로 효과적이었다.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하는 입문용으로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폴레옹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영화 보고 나서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리들리 스콧의 역사물 중에서는 '글래디에이터'나 '킹덤 오브 헤븐'보다는 약간 아쉬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