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이지원 감독의 '발레리나'는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행동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액션 스릴러다. 영화는 전직 발레리나 옥주(전종서)가 절친한 친구 민희(박유림)의 죽음 이후 복수의 길에 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민희는 소울(김지훈)이라는 남자에게 학대를 당하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고, 그녀의 장례식에서 옥주는 민희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을 통해 민희가 겪었던 고통과 소울의 존재를 알게 된 옥주는 법적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직접 복수를 결심한다. 그녀는 자신의 발레 경력을 접고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하며, 체계적으로 복수를 준비한다. 그 과정에서 옥주는 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민재(김지영)를 만나 본격적인 전투 기술을 익히고, 소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옥주의 철저한 준비 끝에 시작된 복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소울은 단순한 가해자를 넘어서 조직적인 범죄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고, 옥주는 점점 더 위험한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옥주가 소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의 세계에 침투하면서, 그녀는 더 많은 피해자들의 존재와 소울 뒤에 숨겨진 더 큰 악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소울이 운영하는 클럽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여성 착취와 폭력의 네트워크는 옥주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민재의 도움으로 무기 사용법과 전투 기술을 익힌 옥주는 소울과 그의 조직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마침내 소울과의 직접적인 대결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옥주의 복수가 단순히 민희 한 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울과 같은 가해자들에 의해 고통받는 모든 여성들을 향한 정의 구현의 과정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는 옥주가 소울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최종 대결을 벌이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옥주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한의 시험을 겪게 되며, 복수의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소울과의 최종 대결에서 옥주는 발레리나로서의 우아함과 정확성, 그리고 새롭게 익힌 전투 기술을 결합한 독특한 싸움 스타일을 보여준다. 격렬한 전투 끝에 옥주는 소울을 제압하고 복수를 완수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영화는 옥주가 복수를 마친 후의 모습을 통해, 복수가 가져오는 감정적 해방과 동시에 남겨지는 공허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하는 삶의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사회적 의미
'발레리나'는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 현대 한국 사회의 여성 폭력과 그에 대한 법적, 사회적 대응의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그리고 피해자가 법적 정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2차 가해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민희가 소울의 폭력에서 벗어나려 했음에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과정은, 실제 폭력 피해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고립과 절망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영화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고, 피해자가 오히려 의심받는 현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폭력 피해자 보호 시스템의 결함을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옥주의 복수는 단순한 개인적 응징을 넘어,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극단적 대응이자 사회적 경고로 읽힌다.
영화는 또한 여성의 몸을 둘러싼 권력과 통제의 문제를 발레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탐구한다. 발레리나로서 옥주의 신체는 예술적 표현의 도구이자, 엄격한 훈련과 규율의 대상이었다. 옥주가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무기화하는 과정은, 여성의 신체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떻게 통제되고 착취되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특히 소울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여성들의 신체가 상품화되는 모습과, 옥주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모습의 대비는 영화의 중요한 주제적 축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발레리나'는 여성의 몸이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아닌, 자기 결정권과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는 복수라는 폭력적 행위가 갖는 윤리적 딜레마와 그것이 복수자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도 간과하지 않는다.
'발레리나'는 또한 여성 연대의 중요성과 힘을 강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민희와 옥주의 우정, 그리고 옥주와 민재의 동맹은 여성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지원할 때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특히 옥주가 복수의 과정에서 만나는 다른 피해 여성들과의 연결은, 개인적 복수가 어떻게 집단적 정의 구현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폭력에 대응하고 생존하며, 이들의 다양한 선택과 전략은 단일한 '피해자상'을 넘어 여성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 또한 영화는 폭력의 순환성에 대한 경고도 담고 있다. 옥주가 복수를 통해 가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그녀 자신도 폭력의 순환 고리에 들어서게 되는 아이러니와 그에 따른 심리적, 윤리적 갈등은 단순한 선악 이분법을 넘어선 성찰을 유도한다.
총평
'발레리나'는 한국 여성 액션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강렬한 비주얼과 섬세한 캐릭터 묘사, 그리고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균형을 이루는 수작이다. 전종서의 열연은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그녀는 발레리나에서 복수자로 변모하는 옥주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설득력 있게 표현해냈다. 특히 발레의 우아함과 정확성이 폭력적 상황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는 독창적이고 시각적으로 강렬하다. 이지원 감독의 연출은 폭력의 잔혹함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또한 영화의 색감과 구도, 음악은 옥주의 심리 상태와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발레와 액션이 결합된 장면들은 영화의 시각적 정체성을 형성한다.
영화의 또 다른 강점은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도 캐릭터들의 심리적 깊이와 복잡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옥주의 복수는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 아닌, 상실감, 죄책감, 무력감 등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킨 과정으로 그려진다. 소울 역시 단순한 악당이 아닌, 체계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괴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입체적 캐릭터 묘사는 관객들이 단순히 복수의 쾌감을 넘어, 폭력의 근원과 구조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영화는 복수의 완수 이후에도 남는 정서적 공허함과 트라우마를 숨김없이 보여줌으로써, 폭력이 남기는 심리적 상처의 지속성을 인정한다.
'발레리나'는 기존 남성 중심 액션 영화의 문법을 전복하고, 여성의 시선과 경험을 중심에 둔 새로운 액션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영화 속 폭력은 단순한 오락거리나 스펙터클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와 심리적 여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특히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의 분노와 그것의 폭발적 표출은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여성성의 표현으로, 기존의 수동적이고 희생적인 여성 캐릭터의 틀을 깨뜨린다. 또한 옥주와 민재로 대표되는 서로 다른 여성 캐릭터들의 연대는 단일하고 균질한 '여성성'이 아닌, 다양한 여성 경험과 대응 방식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처럼 '발레리나'는 장르 영화의 형식을 빌려 한국 사회의 성별 불평등과 폭력 문제를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여성 중심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다만, 영화의 일부 설정과 전개는 개연성이 부족하거나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다. 옥주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전문적인 전투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나, 소울의 조직을 상대로 혼자 싸우는 장면들은 현실적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또한 복수를 위한 폭력의 사용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영화가 충분히 깊이 있게 답하지 못하는 부분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복수가 가져오는 감정적 해방과 동시에, 그것이 또 다른 폭력의 순환을 낳을 수 있다는 딜레마에 대한 성찰이 좀 더 깊이 있게 다뤄졌다면 영화의 주제적 깊이가 더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는 한국 영화에서 흔히 다루지 않았던 여성의 분노와 저항을 강렬하게 그려낸 의미 있는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발레리나'는 여성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복수극이자, 현대 한국 사회의 젠더 폭력 문제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로서 가치가 있는 영화다. 영화는 단순히 개인적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넘어, 그러한 극단적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종서의 강렬한 연기, 이지원 감독의 과감한 연출, 그리고 발레와 액션을 결합한 독창적인 시각적 스타일은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발레리나'는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 관객들에게 폭력의 순환성과 그것을 끊어내기 위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도전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국 액션 영화의 지평을 넓히고, 여성 중심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