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영국 소설 '핑거스미스'를 박찬욱 감독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맥락으로 재해석한 영화다. 고아 출신의 소매치기 소녀 숙희(김태리)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사기꾼 백작(하정우)의 제안으로 일본인 상속녀 히데코(김민희)의 하녀가 된다. 그들의 계획은 단순했다. 숙희가 히데코의 신임을 얻어 백작과의 결혼을 주선하고, 결혼 후 히데코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이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숙희는 히데코에게 점점 이끌리게 되고, 둘 사이에는 예상치 못한 감정적, 육체적 관계가 형성된다. 영화는 이 삼각관계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시점에서 보여주며, 매 장면마다 새로운 반전을 선사한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숙희의 시점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두 번째 파트에서는 히데코의 비밀스러운 과거와 함께 그녀의 시점이 드러난다. 마지막 파트에서는 두 여성이 백작의 계략을 간파하고 오히려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 과정이 그려진다. 영화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 진실 사이의 괴리, 그리고 욕망과 배신, 사랑이 복잡하게 얽힌 심리극을 통해 관객을 매혹시킨다.
역사적 의의
영화는 일본인(또는 일본인으로 위장한)과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구도, 귀족과 하녀라는 계급적 구도,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구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상을 뒤엎는 권력의 전복을 그려낸다. 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역학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를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 바라보지 않는 박찬욱 감독의 복합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영화는 또한 일제강점기 여성의 억압된 섹슈얼리티와 그것의 해방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히데코가 삼촌의 변태적인 에로틱 문학 낭독회의 도구로 사용되는 장면들은 가부장제와 식민주의가 결합하여 여성의 몸과 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착취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통해 이러한 억압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일종의 해방의 서사로 볼 수 있다. 두 여성의 관계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가부장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국 영화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퀴어 서사와 여성의 욕망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대담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또한 문학과 예술이 어떻게 권력과 지배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그것을 전복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 고전 에로틱 문학은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동시에 히데코와 숙희에게는 욕망을 깨우치고 표현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는 식민지 시대 문화적 생산물이 가진 양면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문화와 예술이 가진 복합적인 역할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역사적 배경을 단순한 무대 설정 이상으로 활용하여, 권력, 성, 계급, 민족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탐구하는 풍부한 텍스트를 창조해냈다.
총평
매번 새로운 정보가 드러날 때마다 이야기의 맥락이 완전히 바뀌는 반전의 묘미는 영화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또한 히데코의 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심리적 갈등과 긴장감은 마치 고딕 소설을 보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진영이 연기한 삼촌 코우즈키의 섬뜩한 존재감과 그의 서재에 가득한 에로틱 문학 컬렉션은 영화에 기묘한 분위기를 더하며, 이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학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의 큰 자산이다. 김민희는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내면에 강한 의지를 품은 히데코를 섬세하게 표현해냈고, 신인이었던 김태리는 순박한 하녀로 위장한 영악한 소매치기이자 점차 진정한 사랑에 눈뜨는 숙희 역할로 강렬한 데뷔작을 남겼다. 두 여배우의 케미스트리는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며, 그들의 감정적, 육체적 교감 장면은 관능적이면서도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하정우 역시 매력적인 사기꾼 백작 역할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해냈으며, 정진영은 제한된 출연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 표현과 복잡한 심리 묘사는 영화의 다층적인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 역시 탁월하다. 정성진의 촬영은 서양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저택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숨겨진 어둠을 시각적으로 대비시키며, 특히 히데코의 방이나 서재 같은 공간들은 각각의 특성과 상징성을 지닌 독립된 세계로 그려진다. 류성희의 미술은 193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하면서도 영화의 심리적, 상징적 요소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조영욱의 음악은 영화의 서스펜스와 로맨스를 적절히 뒷받침하며, 편집 역시 복잡한 시간 구조를 명쾌하게 정리한다. 이런 기술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영화의 몰입감을 높인다.
다만 일부 관객들은 영화의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나 복잡한 구조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영화가 보여주는 역사적 배경이 다소 양식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미학적 세계관이 더 강조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은 오히려 영화가 단순한 시대극이 아닌, 욕망과 권력에 관한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인다고 볼 수 있다. '아가씨'는 결국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해방을 이루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와 성별, 계급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과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