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 몇 명이랑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 보고 왔다. 진짜 길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3시간 반이라니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스콜세지+디카프리오+드니로 조합이면 볼 가치 있겠지 싶어서 팝콘 한 통 사들고 극장에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끝나고 좀 지친 느낌은 있었지만 분명 봐야 할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냥 시간 때우는 영화 말고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을 찾는다면 추천한다.
줄거리
줄거리는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오세이지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어니스트(디카프리오)가 오세이지 부족의 부유한 여성 몰리(릴리 글래드스톤)와 결혼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게 다 몰리의 재산을 노리는 음모였다. 어니스트의 삼촌 윌리엄 헤일(드니로)이 이 모든 계략의 배후인데, 드니로가 연기하는 이 인물이 정말 소름 돋게 무서웠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존경받는 지역 유지인데 속으로는 이렇게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캐릭터라니.
영화가 진행되면서 몰리의 가족들이 하나둘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몰리도 독살 시도를 당한다.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어니스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속 공범자 역할을 하는데, 이런 우유부단한 캐릭터가 솔직히 좀 답답했다. 대체 이 사람은 악인인지 비극의 주인공인지 끝까지 애매하다. 근데 이게 또 영화의 의도인 것 같기도 하고. 결국 FBI(당시는 BOI) 요원 톰 화이트(제시 플레먼스)가 수사에 나서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특이했던 건 영화 마지막 부분이다. 갑자기 현대로 넘어가서 이 사건을 다룬 라디오 드라마를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엔 뭐지 싶었는데, 스콜세지가 "우리는 이런 비극적 역사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 결말은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나는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역사의 소비자로서 우리의 책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니까.
시대적 배경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오세이지 부족은 석유가 발견되면서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됐다. 원래 미국 정부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땅으로 이들을 강제이주 시켰는데, 그 땅에서 기름이 터진 거다.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오세이지 부족은 고급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살고, 하인들을 부리는 부자가 됐다. 근데 그 시대 백인들 입장에서는 원주민이 자기들보다 잘 사는 게 못마땅했던 거지.
영화에서는 별로 설명 안 해줘서 찾아보니까, 당시 법적으로 오세이지 부족의 땅과 석유 권리는 매매가 안 되고 상속만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헤일 같은 사람들이 '결혼 → 상속 → 살인'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거다. 더 찾아보니까 실제로 수십 명의 오세이지 부족민이 이렇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영화는 그중에서도 몰리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 시대는 또 인종차별이 노골적이던 때다. 영화에서도 백인들이 오세이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불편하게 느껴졌다. 특히 어떤 장면에서는 오세이지 사람들이 "법적 보호자" 없이는 자기 돈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데, 이게 사실 제도적 인종차별이었던 거다. 그리고 당시 FBI도 이제 막 발전하던 시기라 수사 기법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 범죄가 오랫동안 은폐될 수 있었던 것 같다.
20년대는 또 '재즈 시대'라고 불리는 문화적 변혁기이기도 했다. 영화에 나오는 라디오, 자동차, 새로운 패션 같은 것들이 당시 미국의 모던한 면을 보여준다. 근데 스콜세지는 이런 '화려한 20년대'의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역사를 파헤친 거다. 사실 이런 역사 얘기는 학교에서 거의 안 가르쳐주잖아. 나도 이 영화 보고 나서 오세이지 학살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인 것 같다.
총평
3시간 반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스콜세지의 연출력은 정말 대단하다. 80대 노장 감독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연출이다. 특히 1920년대 오클라호마를 재현한 세트와 의상이 정말 훌륭했다. 영화 찍느라 돈 얼마나 썼을지 궁금할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촬영도 일품이었다. 드넓은 평원과 유전지대를 담아내는 장면들이 꽤 인상적이었다.
배우들 연기는 뭐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몰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이 정말 좋았다. 대사는 많지 않지만 눈빛만으로도 캐릭터의 감정을 완벽하게 전달했다. 디카프리오도 평소의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과는 다른,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 물론 드니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세 배우의 앙상블이 영화의 중심을 잘 잡아줬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오세이지 부족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더 많이 다뤄지지 않은 거다. 몰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주로 희생자로만 그려지고, 그들의 문화나 관점은 상대적으로 적게 나온다. 물론 이건 스콜세지의 의도적 선택일 수도 있다. 백인 관객들에게 역사적 책임을 환기시키기 위해 백인 가해자의 시선을 택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오세이지 부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담겼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중간에 좀 질질 끄는 느낌도 있었다. 30분 정도는 편집했어도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됐을 것 같다. 특히 어니스트가 갈등하는 장면들이 너무 반복되는 느낌이었달까. 그래도 마지막 30분은 정말 몰입해서 봤다. 특히 예상치 못했던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결론적으로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단순한 오락영화가 아니라 미국 역사의 어두운 한 페이지를 파헤치는 중요한 작품이다. 극장에서 보고 나왔을 때 뭔가 무거운 느낌이 있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탐욕과 잔인함이 그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 같아서 불편했달까. 오랜만에 영화 보고 뭔가 생각할 거리가 많이 남았다. 가볍게 시간 때우러 영화 보러 가는 분들한테는 비추하지만, 의미 있는 작품을 찾는 분들한테는 강추한다. 팝콘 큰 거 하나랑 화장실 갈 시간 좀 생각해서 보면 좋을 듯.